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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적 학풍으로 유명한 김육(金堉; 1580~1658)은 개성과 각별한 인연을 가진 인물이다. 김육은 68세가 되던 1647년(인조 25) 4월에 개성유수로 부임했는데, 다음은 그가 개성유수에 임명되었을 때 지은 시다.
17세기가 되면 서양의 과학지식이 중국을 거쳐 조선에 전래되기 시작한다. 그런데 당시 전래되기 시작한 서양 과학지식들 가운데서도 특히 지구설(地球說; 땅이 공처럼 둥글다는 설)은 중국과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하나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지금이야 책을 쉽게 접하지만, 그렇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는 않은 듯싶다. 종이나 인쇄 사정이 좋지 않았던 시절에는 책을 만드는 일 자체가 흔치 않았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에 책을 사서 읽기란 어려운 일이었으리라. 근대 이전에는 인쇄된 책을 일부 구하기는 했어도, 여전히 필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선 오늘날 연천은 1:50,000 지형도 철원·왕징·문산·포천 도엽에 걸쳐 있습니다. 연천은 북부의 가평과 남부의 여주·양평과 함께 경기도에 남아있는 4개 군 중의 하나입니다. 전근대에 연천은 관할면적이 넓은 편이 아니었으나, 1914년 주변 군을 병합하고 한국전쟁 이후 수복지구를 편입하는 등 지속적으로 확대되면서 지금은 영역이 경기도에서 네 번째로 넓습니다.
민영환은 구한말 외교 분야에서 주목되는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1878년에 18살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한 이후 21세에 동부승지, 27세에 예조판서, 33세에 형조판서를 역임 했다. 승진이 이처럼 빨랐던 것은 그가 왕실 외척으로 정국을 주도했던 여흥 민씨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인데,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씨는 그의 고모였고 명성황후도 가까운 친 척이었다.
린 시절 부모와 이별한다는 것은 당사자에게 치명적인 일이다. 그가 아무리 고매한 인격을 지녔다 하더라고 가족과 영원한 이별은 참을 수 없는 슬픔이다. 정조는 11살 때 아버지 사도세자와 비극적인 이별을 하였다. 그리고 그에 게는 역적의 아들이라는 오명이 은밀하게 따라다녔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정조의 할아버지였던 영조는 왕실의 계통을 바꾸면서까지 11살에 죽은 자신의 큰 아들 효장세자에게 정조를 입양시켰다. 그래서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 들이 아닌 효장세자의 아들이 되었고, 이러한 정통성의 취약함을 극복하기 위해 누구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전남 순천에 가면 ‘팔마비(八馬碑)’가 있다. 고려 충렬왕 7년(1281년) 승평부사 최석(崔碩)이 선정을 베풀다 임기를 마치고 내직으로 전임되자, 관례대로 부민들이 말 7마리를 바쳤다. 최석은 이같은 관례는 폐습이라 여겨 개경에 도착하자, 곧 도중에 낳은 새끼 말 한 마리까지 합하여 말 8마리를 돌려보냈다.
이번 호는 경기 7개 지역 중 세 번째 지역 첫 지역으로 구리와 남양주 이야기입니다. 두 곳은 모두 양주군에서 분리된 시(市)입니다. 구리시 지명의 시초는 조선시대의 양주목 구지면(龜旨面)과 망우리면(忘憂里面)이 1914년에 구리면으로 합쳐진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시 면사무소는 지금도 구리시의 번화가인 교문리에 있었습니다.
귀신 이야기가 인기를 끄는 시대가 있다. 어느 시대든 사람들은 귀신과 같은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해 관심과 재미를 느끼지만, 사회적으로 그 정도가 강한 시대가 있는 듯하다. 조선초기가 그런 시대였다. 조선이 건국되자 많은 지식인들은 귀신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해명하려고 애를 썼다. 정도전(鄭道傳)이나 김시습(金時習), 남효온(南孝溫)이 철학적 차원에서 귀신을 설명하려 하였다.
우리는 살면서 융통성을 말합니다. 꽉 막힌 사람들에게 더러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란 말로 핀잔을 주곤 합니다. 특히 각종 인?허가권을 가진 공무원들에게는 뒤통수가 가려울 정도로 빈번하게 듣는 말이기도 합니다. 곧이곧대로 한다는 것이 그리 나쁠 것이 없는데, 자기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매몰차게 한 소리하고 문을 박차고 나가거나, 더 높은 분(?)을 찾아가 이러저러한 하소연을 합니다.